Deleuze and Moving Time (kr)
“실제로 예술가들 또한 사유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이념아 스스로 작업하는 질료에 내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구축을 통해 사유한다.” (Rodowick, 2005, p. 11)
이틀 전 로도윅의 책 “들뢰즈의 시간기계”를 다시 읽었다. 읽은 김에 정리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일단 한국어로 대강대강 노트를 해볼까 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어서 어제 보고 온 Jon Rafman의 작업으로 연장시켜 현재의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도 좋을 것 같다. 또한 다음 글에서는 시간-이미지에 대한 더 자세한 이해와 함께 시간에 대한 서구 철학의 집착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는 내 공간 중심의 연구에 대한 뒷받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솔찍히 이번이 적어도 두번째 읽은 건데도 여전히 이 책은 이해하기가 힘들다. 적어도 그전보다는 이해도가 높아진 것 같지만 여전히 어려운 책이고 어려운 책일 것이다. 그럼에도 들뢰즈의 시네마책 두 권보다는 괜찮지 않을까? 로도윅의 생각이 더해졌기 때문에 아닐 수도… 이 책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고, 1부는 들뢰즈가 베르그송과 가지는 관계를 중점적으로 진행된다. 2부의 경우 시간-이미지 해석, 그 자체의 표현으로서 영화적 시간, 혹은 더 나아가서는 영화에 의해서 변화된 시간에 대한 개념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2부 마지막 결론 지점이 너무 갑작스럽게 정치적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은 아닐까 할 정도로 변한다. 처음부터 영화에 대한 들뢰즈의 관점은 영화 이론의 수립이나 영화 이미지의 분석이라기보다 세계를 이미지화하는 전략의 산출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푸코의 관점과도 비슷하다) 맥락상 같은 선상에 위치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변화가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 내 리서치와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여 일단 이 글에서는 생략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지점은 들뢰즈가 철학, 과학, 예술을 창조 creating의 영역에서 접근한 다는 것이고 바로 이게 그가 다른 학문들을 철학과 함께 이야기 하는 것의 가장 중요한 methodology라고 생각한다. 로도윅에 따르면 들뢰즈의 movement-image 운동-이미지와 time-image 시간 이미지는 베르그송의 시간에 대한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에 따른 각 이미지의 분석은 각각 퍼스와 니체로 나뉘어서 진행된다. 사실 퍼스와의 관계는 그 분석적 배경이 뚜렷하게 보이지만 니체와의 관계는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한번 글을 쓰면서 보충해 보기로 한다. 들뢰즈가 보기에 베르그송이 말하는 시간은 지각될 수 없는, 총합의 것이라기 보다 하나의 열려 있는 것이며 그것을 보기 위에서는 인위적인 분할이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movement-image가 바로 이러한 인위적이고 논리적인 분할에 의한 총합을 중심적으로 이루어지기 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운동-이미지는 역사에 대한 헤겔적이고 변증법적인 개념에 따라 전개되는 반면, 시간-이미지는 니체적이며 계보학적” (Rodowick, 2005, p. 12)이기에 영화는 시간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밖에 묘사하지 못했다.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의 중요한 분열은 세계 대전 II이후로 발생된 지각적 불신과 세상에 대한 이해 불가능성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고 이야기 하며, 그를 통해 영화는, 들뢰즈가 베르그송을 통해 읽은 대로, 지각불가능성을 중점적으로 세상을, 들뢰즈의 개념을 따르면 Plane of Immanence에 더 다가가기 시작한다.
바로 지각불가능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2부는 더욱더 난해한 형태로 변해가며, 하나의 영화 속에서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가 동시에 나타나고 시간-이미지의 예시는 적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더욱 더 복잡스러울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점은 들뢰즈가 작가의 시네마에 더 취향을 드러내면서도 작가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작업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이야기하지 않는 대신 분류적 영화, 마치 철학을 고전, 모던, 포스트모던, structuralism 등으로 나누듯이, 운동-이미지 안에서 질적으로 상이한 시간이라는 단위에 따라 운동의 유리수적 절편들을 수량적으로 관리하면서 몽타주 이념을 창시한다는 점을 통해 무성영화, 소비에트 몽타주 학파, 프랑스 인상주의 영화를 나눈 다는 점이다. 이러한 영화는 다시 그 안에서 움직이는 “기호적 질료 (signage material)로 분석 되며, 이러한 영화를 구성하는 질료들은 모든 종류의 변조 가능한, 특징들 즉 감각적인 것(시각과청각), 운동적인 것, 강도를띠는것, 정서적인 것, 리듬적인 것, 음조적인 것, 심지어 언어적인 것(구어와 문어) 등을 포함” (Rodowick, 2005, p. 37) 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는 들뢰즈가 영화를 일종의 직조를 위한 기계로 간주하는 것에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1
이러한 분석 방법을 로도윅은 들뢰즈가 고전적 영화의 이항대립—리얼리즘 대 모더니즘, 환영주의 대 유물론, 연속성 대 불연속성, 동일시 대 거리두기 등—을 재분할시켰다고 이야기한다. (Rodowick, 2005, p. 18) 하지만 또 한편으로 들뢰즈는 프랑스 내의서의 시네마에 대한 기본 담론을 미래로 끌어왔다고도 볼 수 있다. 들뢰즈가 그 시기 프랑스 시네마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Cahiers Du Cinéma 잡지 그룹과 자주 교류를 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며 The Brain Is the Screen란 제목으로 출판된 들뢰즈의 인터뷰 또한 Cahiers Du Cinéma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로도윅은 이를 들뢰즈가 베르그송의 입장에서 미트리의 관심사에 응답하며 메츠를 비판하고 파졸리니의 논점을 채택하고 있다고 표현하며, 들뢰즈 또한 문화적 엘리트주의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들뢰즈의 방식은 고전적 시네마에 대한 해석을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뒤덮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내 자신이 저러한 이항대립을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들뢰즈의 시선이 언제나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글을 읽으면서 언제나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도록 하자.
운동, 이미지, 기호
영화는 기본적으로 여러개의 이미지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필름이 주를 이루었던 과거의 영화들을 포함해 더 다양한 방식으로 이미지를 병합시키는 현재의 경우도 포함된다. 그는 영화를 베르그송적 직관을 자동적으로 생산하는 가장 근접한 20세기 예술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이미지에는 한편으로 물질의 보편적 변이가, 다른 한편으로 시간 내에서 사유의 운동이 내재한다 → 운동-이미지 (시간의 간접적 현시), 시간-이미지 (시간의 직접적 현시)
들뢰즈는 이러한 기본 전제를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를 가지고 표현하는 두 방식의 영화의 기본 방식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가장 커다란 차이점인, 파편들의 관계와 그들의 총합 또는 집합들에 대한 해석이 바로 그 두 방식의 이미지를 나누게 된다. 기본적으로 들뢰즈에게 있어서 영화는 시간을 표현 혹은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간접적(운동-이미지)으로 이야기 하는가 혹은 직접적(시간-이미지)로 이야기 하는가에 따라서, 시간이 어떤 방식으로 접근되는가에 따라서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뉘는 것이다.
“[영화]에 관련된 테크놀로지를 소개한 과학은 근본적으로 근대 후기의 과학이다. 논리적으로볼때. 영화는 순간성(노출시간의 감소), 순차성(반복가능한 공간적 상수, 영화의 예를들면 35mm), 선형성(영사슬라이드상의 인접하는 등거리의 이미지), 연속성(일정 한비율로 운동을 자동화)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영화는 “운동을 임의의 순간들의 함수로, 즉 연속성의 인상을 창조하기 위해 선택된 등거리 순간들의 함수로 재생산하는 체계 ”(MI, 5/14)로 정의된다.” […] “목적론과 총체성을 강조하는 근대 철학은 전체들을 구축함으로써 운동을 놓치는 과학의 전철을 밟는다.” (Rodowick, 2005, p. 66–7)
즉 다르게 말해서 영화는 근대 과학 안에서 태어났으며 초기에 근대 과학과 철학의 기반 위에서 시간을 유리수적 분할(절편)로 이해하는 그 수행 방식을 이어나간다. “기계론적·환원론적 과학관의 특징은 고정성이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계속 변하겠지만, 자연의 상수는 변하지 않는다. 진보는, 우주가 불변의 총체라면 이론상 구성요소와 그것의 집산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는 관념이다”.2 현재에도 과학은 우주를 질서 정연한 모습으로 그리는 일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예측할 수 있고 계산할 수 있으며 지각할 수 있는 모습의 우주, 그러한 세상은 아인슈타인의 “나는 결코 신이 세계와 주사위 놀이를 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근대 과학과 더불어 WWII 이전의 영화들은 유동적인 여러 구성요소들, 프레임, 쇼츠등은 공간적, 닫힌 단위라는 측면에서 집합이며 개별적으로 모든 방향으로 공간을 개방한다. 그렇게 공간성은 끊임 없이 변화하는 시간적 관계들로 기호적 질료들을 다시 재집합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재구성된다 라고 말하는 편이 더 익숙하지만 들뢰즈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구성은 그 관계적 인과적 연결을 내포하기에 집합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맞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집합들은 크게 두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들은 공간적 단면들의 무리들이며 상대적 위치들을 끊임 없이 수정되고 질적으로 변화하는 전체로 통합된다. 그렇기에 이 전체에는 변주하는 움직임이 존재한다. 커다란 총체 안에서 쇼트들은 전체를 향해 개방되며 추량적으로 관리된 모든 집합은 또 다른 집합 더욱 연장된 집합들의 일부가 된다. 이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이 바로 소비에트 몽타주 개념이다.
- 베르토프의 분석적 고속, 저속 촬영
- 에이젠슈테인의 추상적 또는 지적 운동
- 엡스타인과 뒬락의 율동적이고 측량적인 변주
몽타주 형식은 사유 과정을 지배하는 법칙들의복원이며 그 전개 과정에서 움직이는 실재가 복원된다.3
몽타주는 부분들이 부분과 관계를 가지는 양상 그리고 그 부분들이 전체와 관계를 만드는 것을 통해 전체가 변화된다. 그러므로 전체는 열러있으며 관계는 대상들의 속성이 아니고 항상 그 자신에게서 외재적인 것이다.^[MI, 8/18]
들뢰즈에게 영화는 언어가 아니라 기호적인 것이라고 진술한다. 그렇기에 운동 내의 사유 이미지, 운동에 해당하는 사유 이미지에 대한 이해를 위해 들뢰즈는 퍼스의 기호학을 수용한다.
- 모든 사유가 기호들 내에 존재하는 한 기호는 언어와 동등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유에 가깝다
- 둘째 논거는 우리가 사유나 기호에서 세계를 이해하며, 이때 사유 및 기호는 세계 와 일원론적으로, 즉 실체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Rodowick, 2005, p. 92)
- “셋째 논거는 사유가 비물질적·반영적인 것이 아니라 행동적인 것, 즉 역사적인 만큼이나 실재적인 행위,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처럼 행동적인 활동이 라는 것이다.” (Rodowick, 2005, p. 92)
퍼스에게 있어서 근본적 삼차성이 존재한다. 일차성은 실존의 개념(being-in-itself), 즉 질이다, 이차성은 그에 대한 관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관계들의 종합니다. 하지만 들뢰즈의 베르그송에 따르면 지각-이미지는 지각에 대한 이미지이므로 지각이 다른 유형의 이미지로 연장되어야만 ‘일차적’ 이미지를 구성할 수 있다. 이미지와 기호의 분류학이 잠재적으로 무제한이며 따라서 그는 연역 과정 이전, 운동-이미지=지각 이전에 지각 이미지로 영도성(zéroïté)을 추가한다.이는 실존에 개념을 말하는 순수 지각과 같은 이미지 그 자체에서 지각-이미지(영도성, 혹은 들뢰즈에 따르면 골상학으로 연결될 수 있는 몸체의 도해의 묘사)가 되고 각각 다른 유형의 운동-이미지는 지각이 공간 내에서 연장되는 장소인 감각-운동적 전체들로 정의된다. 이는 지각으로서 시작된 것이 행동으로 실현되거나(이차성), 지각-이미지에서 파생되었으나 행동으로 전환되지 않은 혹은 행동으로 변환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능(잠재력 또는 가능성)기호와 질기호(질적 기호)로서의 감정-이미지,4 그리고 운동의 전체들이 재구성된 관계가 있다(삼차성). 즉 내재성의 평면 위에 있는 아직은 지각될 수 없는 불투명의 잠재적 이미지(권리상의 en droit 의식)가 존재하고 사실상의(de facto) 의식은 특정한 지점에서 출현하며 존재는 우리의 몸체가 관심을 가지는 바로 그 면을 드러낸다. 이러한 운동-이미지는 공간 내에서 연장되어 지각-이미지로 인식되고 이에 더해 감정, 행동, 그리고 총체적 관계가 생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각 이미지는 운동-이미지의 작용으로 수행되는 연역 과정에서의 영도와 같을 것이다. 퍼스의 일차성 이전에 ‘영도성’ (zéroïté)이 있다.” (TI , 31–32/47)
“지각-이미지가 몸체의 도해(圖解)를 묘사하고 행동-이미지가 작용한 다면 감정-이미지는 운동을 질 또는 살아 있는 상태(etat vecu)와 관련시 킨다.”5 이러한 다른 관점은 들뢰즈가 “모든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다” (All consciousness is consciousness of something) 라는 후설의 주장과 “모든 의식온 어떤것이다” (All consciousness is something) 라는 베르그송의 진술을 대조하는 것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흐르는 상태 의 물질에서 지각이 어떻게 추출되는가?
베르그송의 운동의 세가지 테제, 닫힌 체계의 결정, 한 체계를 이루는 부분들 사이에서의 운동, 운동 속에서 표현되는 변화하는 전체를 통한 이미지와 기호에 대한 연역을 표명하며 들뢰즈는 프레임을 인공적, 상대적, 임의적으로 닫힌 공간이자 집합의 형성으로 정의한다. 프레임은 정보량과, 운동역학적 유동성, 점진적 변형, 광학적 국면이나 관찰 각도, 그리고 가장 복잡한 측면인 화면 밖 영역(hors-champ)를 통해서 변수를 생산해 낸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거대하게 팽창하더라도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전체(whole)를 형성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을 따라 전체를 본원적으로 정의하며 전체는 목적론적·전체론적 운동으로 정의될 수도 없으며, 근본적으로 공간적인 형상으로 기술될 수 없다. 오히려 전체는 열림 (Ouvert), 즉 “아무리 큰 집합이라도 각각의 집합이 자족적으로 닫히지 못하게 하는 것, 각각의 집합이 더 큰 집합으로 스스로를 연장하도록 강제 하는 것”(MI, 16/29) 이다.
“결과적으로 몽타주가 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든 다른 어떤 것으로든, 시간 또는 지속의 간접적 이미지다. 베르그송이 비판하는 동질적 시간이나 공간화된 지속이 아니라, 운동-이미지의 분절에서 홀러나오는 사실상의 지속과 시간이다. […] 몽타주는 시간의 간접적 이미지를 구성하는 운동-이미지의 배치다”6
지속을 이해한다는 것은, 시간의 공간화에 해당하는 운동보다 오히려 공간의 시간화에 해당하는 변화를 파악하는 것이다. 시간-이미지는 지각이 대상을 공간 내에서 움직이지 않는 무수한 단면들로 규졍하는 것과 반대로 의식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시간-이미지는 직접적으로 시간 내에서 끊임 없이 전개되는 지속으로 재통합되는 결정체적 이미지, 행동이나 갈등의 완수에 소진되지 않는 해석되어야 하는 이미지들을(가독기호 lectosign) 이야기한다. 이러한 가독기호는 시지각기호(OPSIGNE)와 음향기호(sonsigne), 즉 순수한 시지각적-음향적 이미지들로 텅 빈 공간처럼 열리게 된다. 알랭 레네(Alain Resnais)의 영화 세계의 모든 기억(All the World’s Memory, Toute la mémoire du monde, 1956)와 내 미국인 아저씨 (My American Uncle, Mon oncle d’Amérique, 1978)이 이러한 사유의 시간-이미지를 대표한다.7
베르그송의 시간, 영화의 시간
이제 시간-이미지에 더 자세히 들어가보도록 하자. 위에서 언급한대로 운동-이미지의 가장 대략적인 설명은 그것이 간접적 시간 이미지라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영화는 공간 안에 시간을 구축한다. 이것이 간접적인 운동-이미지를 통해 시간이 공간화가 되느냐 직접적인 시간-이미지를 통해 공간이 시간화가 되느냐에 따라서 두 개의 다른 체계가 되는 것이다. 간접적으로 표현된 시간은 두 개의 방향으로 운동하는데 “하나는 무한히 확장되는 미래로 연장 되어 나가는 화살로 제시되고 다른 하나는 어떤 수치적 단위, 어떤 식으로든 파편화할 수 있는 간격들로 측정되는 미적분학으로 제시한다.”8
물론 이 체계는 완료된 것이 아니며 이 후에도 지속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체계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열려(Open)되어 있다. 시간-이미지는 실재의 초월을 요했고 이 체계 출현하게 된 조건은 네오리얼리즘의 등장이었다. 논리적 결과 논리적 연결성을 추구했던 행동-이미지는 네오리얼리즘에 의해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신 -사실주의적 묘사는〕 그 자체의 대상을 대체하기 때문에 상상적인 것을 관통하는 실재적인 것을 지우거나 파괴한다. 그러나, 다른한편으로 이런 묘사는 상상적인 것 또는 정신적인 것이 발화와 시각을통해 창조하는 모든 실재를 강력 하게 드러낸다.”9
시간-이미지 출현을 위한 세 가지 반전
- 이미지는 행동-이미지를 넘어서 순수 시지각적-음향적 이미지가 됨으로써 감각-운동적 도식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 이미지는 “시간-이미지, 가독적 이미지(image lisable), 사유하는 이미지(image pensante)의 직접적이고도 역량 있는 계시를 향해 열려야 한다.이는 시간기호, 가독기호, 정신기호로 소급된다.”10
- 운동의 질이 새롭게 정의되어야한다. 운동-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며 공간적 절편들의 연속으로 재현된 행동에 더이상 국한되지 않는다.
“감각 一운동적 도식 이 붕괴하면 새로운 잠재력을 가진 집합이 이미지 내에서 열리게 된다. 일단 몽타주의 간격이 유리수적인 것에서 무리수적인 것으로 변한다.” (Rodowick, 2005, p. 148)
이러한 위기를 통해 영화의 몽타주는 새로운 간격들, 탈연쇄하는 무리수적 간격들에 기초하여 재형식화 한다. 로도윅은 시간-이미지가 복잡한 여러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결국 세 가지 종류의 기호에 대해 논하고 있다고 말하며 이 종류들의 기호는 철학적 세가지 문제와 연결된다.
- 가독기호 = 묘사
- 시간기호 = 서사
- 정신기호 = 사유
가독기호는 결정체적 이미지를 구성하는 기호로 유기적 이미지와 대립한다.
이미지의 시각적 요소 및 음향은 내적인 관계로 접어든다. 이는 전체 이미지가 보여야 할 뿐만 아니라 “읽혀야” 함을 뜻한다. […] 이들을 책처럼 구성하는 것은 지각 가능한 세계의 “문자성”(littéralité)이다.”11
그리고 시간 기호는 순수 시지각적-음향적 이미지에서 파생된다. 운동-이미지의 감각-운동적 상황이 사라질 때, 운동의 질(quality)은 시간과 관련해서 변화하며 시간에 대한 대한 관점이 되며 새로운 몽타주 형식 및 내러티브를 개척한다. 시간 기호는 초월론적 시간의 형태를 표현한다. 절편화될 수 없는 하지만 절편화시켜야 파악될 수 있는 시간은 순수 생성의 운동, 즉 ‘과거가-되는 -현재’나 ‘미래가-되는-현재’와 구분되는 다른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Here there is no present distinguishable from a present-becoming-past, on the one hand, and the present-becoming-future on the other). 시간은 지나가는 현재, 보존되는 과거, 비결정적 미래로 끊임 없이 나뉘며, 현재는 그 자신이 될 “과거와 공존하며 과거는 그 자신이었던 현재와 분별 불가능하다.”12
로도윅의 이 다음 문장은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 중에 하나이므로 원글과 비교하도록 해보자
들뢰즈는 이를 시간의 가장 근본적인 작용이라 한다. “과거는 ‘그 자신 이었던’ 현재 이후에 구성 되는것이 아니라 현재와 같은 시간에 구성 된다. 따라서 시간은 매 순간마다 본성상 다르지만 동일한 것에 이르는 현재와 과거라는 각각의 계기로 나뉘어야(se dédouble) 한다. 시간은 상호 이질적인 방향으로 니뉘어야 하며. 이때 나뉜 둘 중 하나가 과거로 전락하는 동안 나머지 하나는 미래로 향한다. 시간은 분열되는 동시에 놓이고 펼쳐져야 한다. 시간온 두 개의 비대칭적 분출구로 분열되는데. 하나는 모든 현재를 지나가게 하며 다른 하나는 모든 과거를 보존한다.”13
Deleuze calls this the most fundamental operation of time: “since the past is constituted not after the present that it was but at the same time, time has to split itself in two at each moment as present and past, which differ from each other in nature, or, what amounts to the same thing, it has to split the present in two heterogeneous directions, one of which is launched towards the future while the other falls into the past. Time has to split at the same time as it sets itself out or unrolls itself: it splits in two dissymmetrical jets, one of which makes all the present pass on, while the other preserves all the past”14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과거는 현재 이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동시에 구성된다는 것이며 이 둘은 분별 불가능하다. 시간은 각 순간마다 현재와 과거로 나뉜다. 본성상 서로 다르지만 같은 것에 해당하는 현재와 과거로 갈라져야 한다. 이 순간 시간은 각각의 순간에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현재와 과거로서, 또는 같은 것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둘로 갈라져야 한다 이질적인 방향으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미래로 발사되고 다른 것은 과거로 떨어진다. 이 두가지—갈라짐과 다른 방향으로 멀어짐—는 동시에 이루어지는데 스스로를 놓음과 동시에 펼쳐져야 한다. 이는 다시 말해 현재와 과거는 동시에 구성되고 동시에 비대칭적 분출구로 분열되며, 하나는 모든 현재를 지나가게 하고 다른 하나는 모든 과거를 보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세 가지 시간기호를 생산하며 이는 두 가지 근본적인 유형으로 나뉠 수 있다. 첫 두가지 시간 기호는 ‘현재의 첨점들(pointes de présent)’ 혹은 ‘과거의 층들 또는 시트들’(couches ou nappes de passé)로 묘사되는 시간의 질서를 포괄하는 이미지이다. 두번째 근본적 유형을 구성하는 세번째 시간기호, 발생기호(génésigne)는 “계열로서의 (또는, 그러므로, 만약, 왜냐하면, 사실상,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논리적 접속어와 호응하는) 시간”을 조직한다. “여기서 이전의 것과 이후의 것은 더 이상 시간이리는 과정의 연속적 결정 이 아니라 역량의 양면 또는 한 역량에서 더 높은 역량으로의 이행”15이며 우리는 변화 또는 변신(métamorphose)을 보게 된다. 이 과정 속에서 “결국 운동은 공간의 묘사를 사유의 기능에 종속시키는 힘으로 재규정 된다”16 그리고 이렇게 재규정된 공간은 유기적 팽창성을 발생시키는 감각-운동 도식이 총체성과 동일성이라는 진리의 이미지로 파악되던 세계를 위기에 빠뜨리게 한다. 이 때의 역량은 ‘거짓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직접적 이미지가 제시히는 것은 ‘‘참된 것의 형식을 대체하는 거짓된 것의 변신”이다.17
베르그송의 시간, 영화의 시간
“베르그송의 목표중하나는 의식·물질·시간의 연속성을 재정립하는 것이다.”(Rodowick, 2005, p. 73)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물질은 이미지이다. 물질과 지각의 차이는 정도상의 차이일 뿐 종류의 차이는 아니라고 베르그송과 들뢰즈 모두 보고 있다. 고전 철학에서 간주되어진 것에서 반대하며 베르그송은 이미지는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도 물질의 재현 혹은 보충물도 아닌 이미지 그 자체로 물질이며 근본적으로 나타남 또는 빛이라고 이야기한다.
“대상온 그 자체로 존재 한다 […] 우리가 대상을 지각할때 이는 그 자체로 그림과 같으며 그 자체로 이미지다. 그러나 그것온 스스로 존재 하는 이미지다. […] 물질은 그것이 지각되는 대로 존재 한다. 물질이 이미지로 지각되기 때문에, 정신은 그것을, 그 자체를 이미지로 파악할 수 있다.”
“[T]he object exists in itself […] the object is, in itself, pictorial, as we perceive it: image it is, but a self-existing image […] Such a mind would naturally believe that matter exists just as it is perceived; and, since it is perceived as an image, the mind would make of it, in itself, an image.”18
베르그송은 물질을 이미지들의 집합체로 부른다. 그리고 물질에 대한 지각이란 것은
나는 이미지들의 집합체를 물질이라 부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미지들, 다만 나의 몸이라는 하나의 특별한 이미지의 가능한 작용을 가리키는 이미지들을 물질에 대한 지각이라 부른다. (원본)19
나는 물질을 이미지의 집합체라 부른다. 물질에 대한 지각은 마찬가지로 이미지들이며 특정한 이미지의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작용을 가르킨다. (내 번역, MM , 22)
즉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미지에는 두 체계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질에 내재한 보편적인 것 present image와 인간의 필요에 따라 여과되는 몸체적인 것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분류는 인간 중심적 해석일 것이다. 이에 더해 이미지의 다수의 체계들이 공존하며 이것을 여러 방식으로 여과하며 몸체적인 이미지들을 생산해 낸다.20
이 때 지각은 운동에 호응할 수 있는 주체가 운동을 반영하고 중단하거나 또는 저지하는 장소에만 존재한다(Perception only exists where movements are reflected, stopped, or otherwise arrested by a subject capable of responding to them). 지각은 한편으로는 감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으로 열리는 간격이다. 이 간격은 적합한 반응이나 행동으로 선택될 수 있는 반응이 하나로 결정되어 있지 않은, 비결정의 중심이며 베르그송은 “공간 내에서 서로 멀리 떨어진 무수한 지점들을 한층 복잡한 운동적 반응과 연관하는 과정이 진행되는 장소로 정의하며 순수 지각이라 부른다.”21 이를 중심으로 “의식 자체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우리가 “사물에 대해 행동하는 생명체의 선택에 달린 비결정의 범위”22를 어떻게 사고하는가에 달려 있다.”23 공간 내에서 운동과 물질이 연속적인 관계로 이어져 있다면 기억은 시간 내에서 변위(dislocation)로서의 간격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기억은, 지각과 대조적으로 시간 내에서 한층 복잡하고 무수한 지점들을 여러 이미지—한편으로는 지각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억 자체에서 끌고 들어온 이미지와 연계하는 과정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직접적 이미지는 그 과정에 대한 시청각적 지도 그리기다.”24
시간-이미지는 기억의 이미지이며 순수 기억-이미지이다. 하지만 들뢰즈에게 있어서 운동-이미지와 시간 이미지를 구성요소를 철저하게 정의하지 않고 베르그송을 따라서 시지각기호와 음향기호에서 회상-이미지로, 다시 결정체-이미지로 이어지는 개열을 통해 점진적으로 구별한다.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지각은 공간 내에서 일어나지만 기억은 시간 내에서 일어난다. 지각과 기억은 서로를 뒤따르고, 서로를 지시하고, 서로를 반영하는 가운데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 말할 수 없게 된다. 궁극적으로 분별불가능한 동일한 지점으로 미끄러지며 혼용되는 것처럼 보인다.25 이러한 불투명함과 투명함, 현행태와 잠재태의 분별 불가능성은 혼동되는 것도 아니고 연대기적으로 시간을 함축하지도 않는다. 한쪽이었다가 다른쪽으로 이동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교차 대구, 이중 인화가 존재한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을 경유해 라이프니츠를 다시 읽어야 했다. 지각과 기억, 현재와 과거 사이 의 간격을 비결정의 중심으로 이해할 때만이 역설적 상황이 역량으로 나타난다.”26 로도윅은 이를 설명하며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과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L’Année dernière à Marienbad, 1961)을 인용한다.
“베르그송에 대한 가장 흔한 비판은, 그가 시간을 내면성의 주관적 경험으로 환원한다는 것이다.”27
내가 이 지점에서 궁금한 지점은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논의를 내러티브가 없는 즉 가독기호(묘사), 시간기호(서사), 정신기호(사유) 중에서 시간기호가 없는 작업 들에서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많은 영화들에 대한 설명이 이야기가 어떻게 풀어나가지는가 혹은 그 내용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지며 그 외 작업들에 대해서는 추가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로도윅의 최근 글이 Rodowick, D. N. (2017) ‘The Force of Small Gestures’, in What Philosophy Wants from Images.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p. 209–222와 그가 편집한 책 Afterimages of Gilles Deleuze’s Film Philosophy (2010)에서 더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글은 다음 글에서 정리해 보도록 하자.
부록: 창조적 진화의 세가지 테제들
어떤 순간들의 연속이든 그곳에서 파생되는 운동은 환영이다 (베르그송) | 운동에 대한 고대의 오류 (영원한 포즈들) 와 근대의 오류 (움직이지 않는 단면들) 는 대동소이 하다 | 둘 다 모두 전체를 구축하고 모든 것이 주어졌다고 가정 → 실재적인 운동의 여지가 사라짐 (MI, 7/17) | |
자연적 지각의 조건을 초월한 운동-이미지의 발견을 “물질과 기억”의 철학적 혁신으로 읽음 (들뢰즈) | |||
순간들의 특질에 비추어 왜 이 운동이 환영인가 탐구 (베르그송) | 영화가 서구 사유의 주요한 과도기적 순간을 점유하는 철학적 이미지를 창안 (들뢰즈) | ||
‘운동을 임의의 계기들과 관련시킬 때는, 어떤 계기에서도 현저하고 특이 한 것 새로운 것의 생산을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MI, 7/17)” (Rodowick, 2005, p. 67) | 새로운 실재를 완성하기 위한 기관(organ)의 출현 | ||
환영과 실재를 운동과 관련지어 대조 (베르그송) → 운동이 지속 또는 전체 내에서의 변화를 표현 | 참된 운동과 거짓 운동을 구별하는 척도(x) | ||
지속내의 질적 변화를 전체와 부분들 (집합들)의 관계 (o) | |||
주된 논점은 그러므로 전체의 본성 | 닫힘은 인공적으로만 가능 | ||
전체는 정의상 본질의 변화(운동에서 공간으로의 변화) 없이는 분할될 수 없다. | |||
“따라서 집합은 항상 공간의 정적인 단면으로 파악될 수 있다” (Rodowick, 2005, p. 70) | 전체는 끊임없는 변형으로 직관할 수 있을 뿐이다. |
ORDER AND CHAOS
크게 보면 들뢰즈의 이론은 Chaos와 Order의 리듬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적어도 내 관점에서 들뢰즈는 카오스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어떻게 끊임 없이 그 둘 사이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촉발되는가 하는 이야기를 그는 하고 있다. 일원론의 관점에서 그 둘은 다른 것이면서도 같은 것이다.